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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오존O3OHN

고성

여행이 끝나면 여독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에 쓰인 독이라는 글자가 신경 쓰여 찾아보니 해로운 독이 맞았다. 무해하고 아름답고 환상적일 것만 같은 여행에 꼭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여독. 기억 저편에 잊혀 있다가 여행이 끝나갈 때 즈음 귀신같이 기어 나오는 음침한 표정의 녀석이다. 눈이 크고 꼭 파충류처럼 녹색 피부를 하고 있을 것 같다. 회복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독은 독이구나 싶다. 축 처진 채로 누워있다 보면 지난 며칠간 만났던 많은 순간들에 괜히 더 일렁거린다.


이번 여행은 고성으로 떠났다. 지난겨울에 첫 방문 후 꼭 찾아오겠다 다짐했던 여름의 고성. 여름 바다는 역시 좋았다. 지난겨울 가득했던 울적한 낌새는 흐린 날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겨울 바다는 마음이 촉촉해지는 맛이 또 있지..) 해변에서 뜯은 과자는 봉지를 열자마자 금세 눅눅해지기 시작한다. 바닷물에 여러 번 젖고 마르기를 반복한 머리는 평소보다 더 곱슬해진다. 오랜만에 쬐는 뜨거운 햇빛에 어깨는 애플망고처럼 붉게 익어간다. 포켓몬처럼 사람에게도 속성이 있다면 나는 바다속성이지 않을까..


  • 일단 먹어야지..


테일 : 해변의 낭만적인 카페를 꿈꾼다면 무조건 이곳을 방문해 보시길.. 인테리어와 메뉴 하나하나 꼼꼼히 고심한 정성이 느껴진다. 음료와 디저트 모두 아주 훌륭했다.. 카페인에 민감하여 디카페인 커피, 자두 칠러, 패션후르츠 칠러를 먹어봤다. (제철 과일은 못 참아...) 타르트와 쫄깃한 빵떡 디저트도 추천! 지난겨울 먹었던 딸기 파블로바는 정말 미쳐버리는 맛.. 파블로바 가능한 시즌이 되면 꼭 드셔보세요..

반려동물 출입 가능! (언제나 다정하고 나른한 테일이가 누워있다.) 도자기를 사랑하는 사장님이 직접 만든 작품들도 판매하고, 가게 이곳저곳에서 현대미술의 거장 메리 작가와 이슬로 작가의 손길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썬크림 :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가게다. 젤라또를 좋아한다면 무조건이다.. 올여름 처음 맛본 수박 그라니따는 정말로 충격적인 맛.. 모든 맛을 먹어봤고, 겹치는 것 없이 특색이 뚜렷해서 좋았다. 유자 우유와 천도복숭아, 그리고 '아이슬란드' 맛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심상을 뚜렷한 맛으로 표현해 내는 주인장의 재주가 부럽다. 산, 바다로 지은 이름의 시그니처 젤라또들을 맛보면 정말 그런 맛이 난다.


보배진 : 썬크림과 바로 이웃해 있는 돈까스 집. 성수기에는 웨이팅이 길어서 서둘러 가야 한다. 내공이 오롯이 느껴지는 깔끔하고 단단한 맛. 고성에 처음 왔을 때 많은 분들이 앞다투어 추천해 주었던 곳이다. 강력 추천!


슬로우댄스 : 식사도 했겠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한 잔 걸치러 가야지.. 음악인 주인장의 취향이 가득 담긴 장소. 차를 가져가서 생맥을 못 마셔 본 게 한이다.. 선선한 바닷바람 맞으며 벌컥벌컥 들이켜는 거품 낀 생맥 한 잔.. 물론 이곳은 와인이 메인이다. 처음 느껴봤던 고소한 와인도 이곳에서 마셔봤다. 선곡이 자주 내 취향이라 더 끌리는 장소.. 종종 음악회도 열리곤 하니 음악과 술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무조건 마무리는 이곳에서~


백촌 막국수 : 너무 유명해서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 번 먹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취향에 따라 들기름과 동치미 국물 양을 조절해서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천연 소화제라는 명성에 걸맞은 동치미.. 긴 웨이팅의 묵은 때를 싹 씻겨준다..


만나고 쪽갈비 : 매 끼니가 만족스러웠지만 진하게 한바탕 물놀이를 한 뒤에 먹었던 쪽갈비가 잊히지 않는다. 함께 나오는 냄비 김치찌개는 맑고 시원-한 게 상당히 위험한 맛이다. 찌개보다 탕이 어울리는 맛. 양념과 오리지널 두 가지 먹어봤는데 취향에 따라 드셔보시길! 양념은 맵싹 하니 불에 그을린 탄 맛이 강하다. 오돌뼈 볶음밥도 매콤하고 식감이 좋아 흔하지 않은 맛이다. (체인이라 다른 지역에도 있음!)


  • 그 외에도..


이번에 물곰탕을 처음 먹어봤는데, 시원함이 한계치를 넘어 선 느낌이었다. 함께 주문한 생선 조림도 역시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먹어줘야 한다는 것이야.. 잘하는 집은 많을 테니.. 한번 찾아 잡솨보셔라..


바닷가랑 포카칩 어니언 맛이 상당히 조화로웠다. 햇감자 에디션이 얼만큼 더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놀이로 짭짤해진 입에 감자칩이 들어오니 아주 좋았다.


계곡도 좋은 곳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다. 아쉬워~~


여행지에서 절이나 사원에 가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는 화암사에서 아주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숙소는 무꿈이라는 곳을 추천합니다.. 섬세하고 이국적인 인테리어에 예쁘고 프라이빗한 정원까지 누릴 수 있는 곳! 숙소에 묵는 동안 꿈 없이 달콤한 잠을 자라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직도 동해의 일출을 보지 못했다.. 섣달그믐날 부푼 마음으로 고성을 방문했으나 구름 잔뜩 낀 하늘만 주구장창 봤다.(생애 첫 해돋이 여행) 과연 날씨요정(어둠의)은 과연 누구였을까로 갑론을박이 있었다. 이번 고성에서도 온갖 해무와 파도와 차가운 수온으로 물놀이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마도 그 원인이 나였던 것으로 추정 중..


이번 여행에서는 Gilbertos Samba (Ao Vivo)를 많이 들었다. 여름과 참 잘 어울리는 앨범이야.. 유튜브에서 라이브로 처음 접했다. 미니멀하고 귀여운 악기 구성에 보는 맛이 좋았다.

Ao Vivo는 포르투갈어로 라이브 공연이라는 뜻인가 보다. 다음 언어는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다. 포르투갈어에서 오는 어감, 리듬, 멜로디가 굉장히 신선하다.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 미루던 곡의 가사를 쓸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역시는 역시.. 좀 더 묵혀봐야 알겠다. 그래도 다녀와서 바로 새로운 리프를 만들었다. 아마도 첫 곡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아마 오늘 정한 이름이 새로운 앨범의 제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역시 첫 아이디어가 가장 따끈하고 좋은 걸까나..


휴가철에 여행을 다녀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더위를 피하러 떠난 것이 아니라 더위를 마주 보러 다녀온 기분이다. 다행히 병은 나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맞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여전히 사람을 대하는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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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매번 이렇게 자세하게 써주셔서 감사해요. 기회가 된다면 숙소, 식당, 바닷가와 포카칩어니언 손민수 해보겠읍니다.. 그나저나.. 초록색 포카칩파이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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