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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자른 이유

최종 수정일: 1월 5일

머리를 깎은 지도 벌써 일 년이 넘게 지났다. 이만큼 짧아졌으니 아마 머리를 자른다는 표현보다는 깎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까까머리 상태에서 다시 결심을 하고 기르게 된 지는 이제 네 달 정도 됐으려나.. 오래 유지하던 파마머리를 자르고 짧은 머리로 돌아간다는 게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어쩌면 모른 척하고 있던 걸지도..


나에게 있어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결심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녀온 오래된 콤플렉스 때문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중고등학생 즈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이마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넓고 도드라진다는 걸 깨닫고는 조심스레 앞머리로 가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내가 앞머리만 들추면 친구들이 뒤집어지는 이유가 그냥 내가 짓는 표정이 웃겨서라고 생각했는데, 유별난 이마 크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가 고등학생 때 유행하던 머리가(지금도 학생들은 많이 하는 것 같다..) 윗머리부터 앞머리까지 기를 끌어모아 눈썹까지 덥수룩하게 뒤덮고 다니는 스타일이어서 나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두발 규정도 옆머리와 뒷머리만 단정하게 유지하면 굳이 앞머리를 짧게 치도록 강요하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스무 살 무렵 입대와 제대를 겪으며 짧은 머리의 편의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신세하랑 같이 공연을 하던 시기동안은 아예 면도날로 밀고 다닐 때도 있었다. 전역 직후 매일매일이 거지존인 상태에서 머리를 꽤 길렀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충동적으로 머리를 전부 면도기로 밀어버렸다. 얼마 나지도 않았던 수염 말고는 한 번도 밀어본 적이 없으니 거의 한 시간 정도를 낑낑대며 주방가위를 동원해 잘라냈던 것 같다. 두피에 상처도 꽤 났었다. 마침내 회색으로 반짝반짝해진 머리를 만지다가, 바닥에 덥수룩하게 쌓인 머리카락을 비닐봉지에 담아 가족들이 놀라지 않게 쓰레기통에 담아두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나오려니 어머니가 놀라실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에 "엄마 나 머리 밀었어.." 하고 조그맣게 경고를 날린 후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는 미묘하게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며 크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일종의 테스트였던 것 같다. '나에게 어울리는 머리를 찾는 게 어렵다면, 아예 머리가 없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도 내 두상에 어울리는 머리를 찾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머리를 담당해 주셨던 많은 디자이너 분들도 두상, 모질, 머리가 난 방향, 숱 등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머리라고 말했다. 아예 짧거나, 긴 극단적인 스타일로 하거나 앞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앞머리를 가리고 다니기는 싫었다. 몇 년 동안 덥수룩한 머리로 살았으니, 이제는 나에게 어울리는 다른 머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헤어스타일로 인해서 내가 갖고 있던 캐릭터 혹은 정체성, 이미지, 별명들마저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정체되었고, 틀에 갇힌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파마머리는 오리지널리티 없는 가짜야!'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집에서 파마를 한 번 풀어봤다. 마침 집에 남는 매직 약이 있었다. 몇 주 정도 생머리로 지내며 또 주변 반응을 테스트하는 시기를 거쳤다. 앞에 있어도 주변 지인들이 못 알아보는 상황도 자주 겪었다. 한 번은 공연이 있어서 갔던 춘천 편의점에서 예전에 제작한 한정판 머천다이즈를 입고 계신 분 앞으로 몇 번을 지나다녔는데(고의는 아니고 편의점이 상당히 협소했다..) 결국 못 알아보셨다.. 같이 있던 형들이 내 머리 얘기가 나오면 자주 꺼내는 일화다. 그런 머리를 향한 관심들이 처음엔 많이 어렵다가도 이내 적응이 되는 게 신기했다. 내 머릿결만큼 억센 똥고집 때문에 이왕 머리 자른 거 한번 유지해 보자! 한 게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절대 부모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어릴 적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왜 내 이마는 이렇게 넓은 거예요.." 중얼대다가 아버지께 한 소리 들은 적이 있다. 답변으로는 "이미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니, 그럼 그 이마를 좋아해 주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엄청난(예쁜) 이마를 갖고 계셔서, 오히려 보통의 이마를 타고난 친누나가 신기할 정도다.(사실 부럽다..) 돌이켜보면 어른들은 내 이마를 보시고 항상 좋아해 주셨다. 칭찬을 넘어 부러움을 샀던 적도 있다. 참 복이 있는 이마야, 앞길이 훤하게 트인다 하시며 친구들에게 놀림받던 설움을 많이 덜어주시곤 했다.


마침내 이제 내 광활한 이마를 좋아하기로 했다. 거의 20년 만에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최면 및 자기 암시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 같기도 한데.. 좋아해야지 뭐 어쩌겠나! 내가 세상의 모든 머리를 해본 것도 아니면서 너무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세상은 넓고 모든 사람은 다 생긴 그대로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진지하게 헤어라인 교정을 받아보라는 조언도 받았다. 근데 그건 또 숨기는 느낌이 드니까 또 그건 아직 싫단 말이지.. 일단은 무작정 길러보기로 했다. 생머리로 긴 상태도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고.


이런 얘기를 얼마 전 갔던 여행에서 친구한테 처음 털어놓으니 "넌 진짜 미친놈이구나.."라는 얘기를 들었다. 근데 털어놓고 나니까 좀 더 명확하게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지녀온 콤플렉스의 역사를. 그리고 내심 미안해졌다. '머리가 다르다고 다른 사람은 아니잖아!'라는 주의였지만, '그 머리'를 한 내 모습이 편안했을 사람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문을 닫아버린 것만 같아서.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인 것도 맞는데, 그래도 자연스럽게 무슨 말을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헤어스타일 철학입니다. 앞으로도 제 머리를 잘 지켜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용기를 준 친구 김후인에게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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